집에서 먼 성남까지 아침 일찍 나섰다. A가 좋아하는 전투기를 잔뜩 볼 수 있다고 해서 였다. 사람은 넘치게 많았고 통제는 잘 되지 않아서 혹시라도 A와 동생 C가 다칠까봐 예민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침 일찍 나오느라 오늘은 졸로푸트도 먹이질 못했다. 주말엔 원래 메디키넷을 먹지 않으니 졸로푸트라도 먹였어야하는데..
아이는 메디키넷의 지배에서 벗어나 원래의 해맑음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주차를 하고 행사장까지 20분 넘게 걸어가야했지만 모든 발걸음이 가벼웠고 기대감으로 쉴 새 없이 말을 해댔지만 함께 가는 삼촌과 할아버지를 챙기기도 했고 동생의 칭얼거림도 챙겨주기도 했다. 형다웠다.
입장 전에 많은 인파가 몰려 갑갑하게 서 있어야하는 상황이 생겼다. 하지만 운이 좋게 에어쇼의 하이라이트를 볼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답답해하다가 엄청난 굉음을 내는 블랙이글스가 하늘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눈 한 번 떼지 않고 공연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역시 몰입감은 A가 최고다.
겨우겨우 입장을 했는데 먼저 입장한 조카 J가 만든 블랙이글스 모형이 너무 부럽단다. 그렇다면 점심을 먹고 한 번 가보자고 잘 달래보았다. 메디키넷이 없으니 아침도 점심도 정말 잘 먹는다. 잘 먹는 모습이 저렇게 이쁜데 방학때라도 단약을 해야하나.. 만약 단약을 한다면 아이 학습은 어떻게 하나.. 대신 키는 훅 클 것 같은데.. 12월 진료에 의사와 한번 상의해봐야겠다.
점심을 먹고 아빠와 손을 잡고 엄청 신나서 블랙이글스 만들기 체험을 간 녀석이 빈손으로 돌아와 나를 보자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서 재료 소진으로 못 만들었다고. 보통 같았으면 엄청나게 짜증나거나 큰 소리로 과장되게 울면서 지금 당장 저 만들기를 할 수 있는 걸 주문해달라고 울었을 녀석이다. 근데 오늘은 슬프지만 차분하게 "엄마 나 너무 속상해" "만들고 싶은데 만들 수가 없어" 라며 자기의 속상한 마음만을 내게 전해줬다. 형아가 가지고 있는 블랙이글스 모형을 그저 바라만 보면서 말이다. 아마 보통 같았다면 형아것을 일부러라도 뺏어 가지고 놀고 싶다고 떼를 부렸을 것인데..
아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속상한 마음에 불필요한 감정을 덧붙이지 않은 것은 기특해서 한참을 안아주었다. 아빠는 혹시라도 다시 재고가 들어오지 않았을까 가보았다. "정말 많이 속상했겠다. 엄청 기대했는데" "만약에 오늘 못 만들면 니가 얼마나 하고 싶어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집에 가서 같이 도안으로 만들어보자" "어제 우리끼리 비행기 프린트해서 박스로 만든 비행기도 참 멋있었잖아? 그렇게 블랙이글스도 만들어볼까?"라며 아이를 달랬다. 생각보다 쉽게 진정이 된 아이는 어제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얼마나 멋졌는지 말하며 블랙이글스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 팜플렛을 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운좋게 다시 재고가 풀려 체험을 할 수 있다며 얼른 이쪽으로 아이를 보내라는 남편의 연락이 왔다. 소식을 들은 아이는 정말 하늘로 튀어오르며 신나서 아빠에게 뛰어갔다. 남편은 나중에 "A가 나한테 달려와서 꽉 안아주면서 '아빠 정말정말 고마워요.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최고에요!!'라고 했다고!"라며 자신의 성과를 뿌듯해했다. 나 역시 남편의 기민한 대처에 정말 당신밖에 없다며 엄청 치켜세워줬다.
조카 J도 한 번 더 체험을 한 덕에 동생 C까지 모두 블랙이글스 모형을 든 채 집에 돌아 올 수 있었다. 모두 행복하게 즐겁게 화도 짜증도 호통도 질책도 없이 돌아온 외출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A에게 말했다. 엄마는 니가 블랙이글스 모형을 못 만들게 되었을 때 화내지 않아서 너무 놀라고 기특했다고, 그래서 니가 필요없다고 해도 블랙이글스 만드는 걸 사주려고 했었다고. 니가 니 속상한 마음에 다른 행동이나 소란을 덧 씌우지 않고 그 마음만 그대로 보여주니까 너를 혼내지 않고 너의 그 마음을 제대로 달래 줄 수 있어 좋았다고. 앞으로도 A가 그렇게 속상하거나 힘들 때 그 마음만 그대로 보여주면 엄마는 흔쾌히 너의 그 마음을 토닥여줄 수 있다고.
A도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겠다고. 아이가 내 말을 잘 이해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아이는 오늘 자신의 충동성을 나름의 방법으로 조절해냈고 그 덕에 혼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위복으로 원하던 걸 또 얻어내기까지 했으니까. 오늘의 경험은 아이가 앞으로 겪게될 충동성과의 전쟁에서 좋은 무기로 사용될 것이다. 아이는 충동성이란 녀석이 난동을 부릴때 오늘의 경험을 꺼내서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충동성을 잠 재울 수 있을 것이다. 다음번엔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서 또 엄마와 실갱이를 부리고 분노가 올라올 수 있다. 그럴땐 또 나는 A가 충동성에 지게 두지 않고 좌절하게 만들어 충동성은 A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줄 것이다. 그렇게 A가 조금씩 충동성을 다스리고 조절해 자신이 진짜 필요한 걸 가장 쉬운 방법으로 얻어 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오늘의 멋진 승리를 기억하자. 그리고 아이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말자. 나는 아이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함께 아이가 어른으로 가는 여정을 함께 하는 것 뿐이고 원래 모험에는 괴물과 마법사와 공룡 등 이겨내야할 것 들이 많다.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이겨야할 것들과 싸워 이기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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